[건축리포트 와이드 7-8월호] 에 건축가 유걸의 '건축의 일반해' 란 글이 게재되었습니다. 아래 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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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일반해
일반적으로 우리는 설계를 건축물이 들어설 대지의 파악에서부터 시작한다. 대지가 놓여있는 모양이나 향 그리고 주위의 환경을 분석한다. 건축물이 만들어져 쓰일 목적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한 작업 또한 설계 과정의 처음에 빠뜨릴 수 없는 내용이다. 그리고는 여타의 많은 작업들을 실제로 건물의 모양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수행한다.
건물을 사용할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 라던지 건물이 쓰일 목적의 궁극적인 의미까지도 생각하다 보면 건축가들은 공학자에 더해 사회학자가 되기도 하고 철학자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건축물이 크거나 또는 작거나를 떠나서 건축가는 매번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건축물을 설계하고 또 이 설계에 따라서 시공을 하게 되는데 이 설계는 일회용으로 끝나고 반복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건축설계가 특정된 대지에 지어지는 특정된 사람 또는 사람들을 위한 특정된 목적을 위한 것이 되는 것이 일으키는 문제가 있다.
맞춤제작을 위한 맞춤해법(Custom Solution)은 우선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수적이게 한다. 설계의 비용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건축가들은 항상 설계비가 충분치 않은 것을 원망한다. 건축가들이 설계비가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건축가들이 설계를 하기 위해서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많은 것에 비하여 특히 한국의 설계비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그래서 건축 실무자들은 설계과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노력과 연구들을 하여 왔다. 건축의 분야나 건축을 구성하는 여러부분들을 전문화시켜 효율을 높이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었지만 많은 건축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건축의 한 분야나 부분만을 기계적으로 다루면서 건축의 전반을 이해하거나 건축의 전반이 만들어지는 것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스러운 것은 물론이고 아직도 부족한 설계비용 때문에 모든 건축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야근과 철야는 일반화가 되어있다. 정해진 시간에 일을 시작하고 정해진 시간에 일을 끝내는 일상은 오히려 태만으로 보일 정도로 건축하는 사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다. 그러면 건축가들의 서비스를 받아야할 일반인의 사정은 어떨까. 건축가들이 이렇게 착취당하는 모양으로 있는 것만큼 많은 덕을 보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건축가들의 서비스는 너무 비싸다. 건축가들이 착취당한다고 생각하는 그 비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감당하기 불가능한 비용이다. 모든 사람들은 집이 필요하다. 일을 하려면 사무실이 필요하고 공부를 하려면 학교가 필요하고 건축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축가들의 비용이 너무 비싸 감당을 하기가 힘들게 되어있다. 건축가에게는 너무 싸고 사용자에게는 너무 싸고 비싼 설계비는 사태를 더욱 나쁘게도 만든다. 높은 설계비를 감당할 수 없는 대다수의 건축 수요자들은 건축산업의 다른대안으로 그 문제를 해결한다. 건축 서비스는 모든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늘 맞춤해법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들은 의,식,주의 의와식 즉 입고먹는 문제는 해결 된 세상에 살고 있다. 끼니를 굶는다거나 누더기 옷을 걸치고 다닌다는 일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의 감각중 가장 까다롭다는 맛 감각도 극복되고 먹는 문제의 해결은 일반화 되어있다. 호사를 하기 위하여 맛집을 찾아 다니고 유명한 요리사가 인기 사회인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이것은 이제 먹는 것이 일상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필자가 어릴 적만해도 어머님이 만든 김치맛이 최고이고 다른데에서 그만한 맛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간장이나 된장도 집안에서 대대로 만들어온 비법이 있어 장이 바탕이 되는 음식은 지방마다 틀리고 집집이 달랐었다. 하지만 일본의 기꼬맘 간장이 세계를 재패한 것이 반세기가 넘었고 종갓집 김치는 모든 가족의 밥상에 오른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먹을 수 있게 까지 되었다. 순창고추장, 안동 고등어 등등 집안의 요리비법이 없이도 왠만한 잔치도 대형 매점들에서 마련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먹는것의 맞춤해법은 이미 기억에서도 사라지고 일반해가 일반이 되었다. 입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시 필자의 기억을 얘기 하자면 겨울이 오면 솜을 넣은 버선 그리고 바지저고리를 어머니가 준비하기 시작 하셨었다. 부드러운 융이라는 재료로 잠옷도 만들어주셔서 몸에 잘 맞진 않았어도 처음 입었을 때 느꼈던 그 부드러운 촉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된다. 장갑은 물론 털실로 짰는데 그래서 늘 만들기 쉬운 벙어리 장갑만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이제 특별히 연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입는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입는 모든 것은 동대문시장에서 해결한다.
물론 의상 디자이너에게 부탁하여 맞춤의상을 만드는 분들도 있으나 이것은 입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특수한 경우를 위한 것이며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유명세가 붙은 의복정도를 백화점이나 명품점에서 구하는 정도이고 모든 사람들은 할인매장이나 지하상가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찾는다.
이제 입는 것을 갖고 빈부를 가릴 재간은 없다. 입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빈곤한 모양을 만들려고 청바지를 일부러 갈고 찢고 해서 허름해 보이게 하려고 경쟁을 하기도 한다.
왜 건축은 늘 특수한 해법으로만 공급이 되는 것인가.
건축이 일반해법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건축에 대한 이해나 건축물을 만드는 방법 두 곳에 다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건축이 맥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맥락, 도시적 맥락 그리고 대지의 맥락과 연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연계와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 하나는 건축의 목적, 그리고 기능을 중요하게 여겨서 기능을 제대로 해결 하는 것이 건축가의 큰 역할로 생각한다. 그래서 답은 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좋은 건축이라고 까지도 한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생각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일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우선 싸다는 문제가 있다. 소위 우리가 옳다고 하는 그런 건축은 무척 비싸다. 그래서 선택된 몇 사람만이 이 옳은 건축을 소유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틀린건축, 나쁜건축에서 살 수밖에 없다.
이런 건축에 대한 생각은 건축물을 만드는 방법에서도 일부 영향을 주고 또 문제되는 그것을 정당화 하고 나아가서 미화하기도 한다. 우리가 쓰고 있는 건축은 무겁다. 건축은 무거워서도 비싸다.
건축이 무겁기 때문에 기초를 튼튼히 한다. 땅속 깊이 그 뿌리를 박는다. 건축은 지역성이나 대지와의 맥락성 때문에 땅과 일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건축은 튼튼하고 깊게 대지에 뿌리를 박는다. 하지만 이것은 건축이 무거워서 비싸지는 것 뿐 만이 아니고 인간이 생산할 수 없는 한정된 자원인 땅에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건축을 일체화 시킴 으로 건축을 그야말로 비싸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건축가들은 건축을 부동산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몹시 불쾌해 한다. 그런데 땅은 누가 뭐라해도 부동산이다. 이 부동의 땅과 일체화가 된 건축이 비싼 부동산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요즘 건축의 지속 가능성은 모두가 관심을 갖는 화두이다. 그런데 이제 건축이 내구성이 문제가 되어 지속가능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없다. 많은 경우는 건축물의 성능이 떨어졌다거나 기능이 적합하지 않게 되어 폐기되는 것이다. 건축물을 몇 년 사용하지 못하고 폐기하게 되었을 때 그 건축물의 생명주기 비용은 높아진다. 그러지 않아도 무거운 건축의 비용이 적지 않았는데 생명주기비용에 이르러서는 정말 고가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건축의 맞춤해법의 다른 문제가 보인다. 기능에 충실하여 사용 할 사람에게 사용할 목적에 딱 맞추어 설계한 건축이 문제를 해결했다기 보다는 문제의 원인이 된 것이다. 현대인의 생활은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다. 일간계획, 주간계획, 월간계획 그리고 연간계획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다. 도시계획이나 건축계획도 계획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속성은 이들과 유사한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데 모든 계획은 조만간 틀리게 되어있다. 모든 계획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사람들은 늘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계획이 변하는 사람과 늘 잘 들어 맞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건물이 합목적적이 되어야 하고 기능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계획에 의해 살고 있는 현대인의 딜래마(dilemma)이다.
건축의 해법이 특수 맞춤해법이 아니고 일반해가 되어 반복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면 건축서비스의 비용은 훨씬 저렴해 질 수 있을 것이다. 한 건축의 해법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공간적으로도 지역을 뛰어넘어 사용될 수 있다면 이런 건축을 하는 건축가는 아마 축재도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어떤 건축이 좋은 건축인가.
좋은 건축은 사용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필요한 환경을 선택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건축이다. 모든 사람들이 필요할 때 필요한데로 자신이 좋아하는데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건축이 좋은 건축이다. 사용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고 또 개선, 보수해나갈 수 있는 건축이 지속가능한 건축이다. 우리들이 토속건축이라고 부르는 건축들은 건축가가 없는 건축들이다. 사용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경들이다. 이들 건축들을 보면 지속가능하기도 할뿐더러 보기에도 나쁘지 않다. 다시 필자의 옛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렷을 적 겨울이 오면 어머니나 누님들이 김장을 하느라 분주할 때 형님이나 나는 문을 떼어내어 찢어진 창호지를 뜯어내고 물로 깨끗하게 닦아내고 새로운 창호지를 바르는 일을 했다. 새로운 창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일은 봄에도 반복이 된다. 시골 동네를 보면 추수를 한 연후에 이웃들이 모여 지붕을 짚으로 새롭게 엮느라 분주하고 겨울이 되기전에 새로운 지붕들이 모습을 들어낸다. 흙벽이나 또는 장판까지도 새롭게 만들어 지는데 장판을 새로하고 나면 콩기름을 서너 번 발라서 마감을 하는데 그 냄새는 아직도 기억이 된다.
문고리를 바꾼다던지 창문 하나를 개선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속수 무책이다.
나는 전구 하나도 바꿀줄 모른다는 질책을 가끔 받기까지도 한다. 우리들은 환경문제에 있어 전문가들에게 종속되어 있다. 그리고 자본가에게 지배되고 있다.
이것은 건축물을 만드는 방법에서 비롯된 문제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 건축가들은 나를 포함해서 관심이 없다.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 익숙해져서 손하나 움직이지 않고 토털 서비스(Total Service)를 받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는 듯 하나 사람들은 역시 자기의 생활이나 자기의 삶에 자신이 주인이 되었을 때 가장 기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것이 건축의 민주화다.
현대건축을 주장한 건축가들의 꿈은 한정된 귀족 계급에 속해있던 예술과 건축환경을 일반인에게도 보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량 생산은 그들에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들이 갖고 있던 한정된 수단이었고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서 그 수단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현대건축이 경직된 합목적성의 한계로 폐기가 된 현재에도 그들이 갖고 있던 사회의식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내세운 현대 건축가들은 그들이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았으면서도 건축을 자율적인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만든다. 그래서 요즘 건축을 알던 모르던 모든 사람들은 건축가를 예술가로 생각하기도 하고 또 건축가 스스로도 그런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끊임없는 야근과 철야에도 일말의 소명의식 속에서 자부심을 갖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건축은 이 부분에서도 철저하게 실패했다. 우리들은 예술가일 수가 없었다. 예술가 들이 갖고 있는 자율성을 건축가들은 가져본 적이 없다. 건축일은 건축을 필요로 하는 건축주가 있고 부터 시작이 되고 건축가는 건축주로부터 독립한 적이 없다. 미술가들이 귀족이나 권세가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으로부터 독립하여 그림을 그린 것 같이 건축가들이 건축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건축을 한 적이 없다. 나는 건축주와 함께 건축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늘 강조해 왔고 그래서 건축의 사회성을 늘 의식했는데 요즘 나는 건축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건축을 한 적이 없다. 는 건축주 없는 건축을 꿈꾼다. 건축가 없는 건축, 건축주 없는 건축 이 두 가지는 동저의 양면인지도 모르겠다. 건축의 사회성과 예술성의 모순된 관계를 건축의 일반해가 풀어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나는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건축주들로 하여금 건축가들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가 자기가 원하는 건축을 선택하고 만들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건축가들은 건축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차별화 된 자신만의 일을 할 수 있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건축의 일반해는 만병통치약 같이 하나의 건축물이 모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일반해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 맞춤이 가능하게 해주는 해법이다. 사용자의 다양한 조건이나 변화 속에서 작동하는 해법인 것이다. 그리고 건축가는 건축주에 종속되어 문제 해결사 역할을 하는 것에서 독립되어 창조적 개인이 될 수 있게 할 것이다. 현대는 그런 해법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기술을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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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붙여진 "현장리포트-실천적 유토피아주의자의 현대에 대한 긍정" 이란 글도 함께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