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건축평단」 봄호에 유걸 건축가의 글이 실렸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자 아래 내용 공유드립니다^^
건축평단 2017.봄 「반지역주의,반세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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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건축
“ARCHITECTURE OF DEMOCRACY”
유걸
인류는 지난 반세기 이상 평화로운 세상을 누려왔다. 폐쇄적 고립주의보다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열린사회의 혜택이 크다는 경험으로 많은 사람들은 빈곤에서 해방되고 권력의 압재에서도 풀려나는 세상을 맞이한다. 세계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고 인류보편가치를 확신하게도 만들어 주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고 또 평등하다는 인식은 사회가 산업화되고 현대화되기 시작하는 것과 함께 태동된다. 사회 계층의 벽이 무너지고 일부 계층이 누리던 부와 문화가 일반 대중에게도 제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역을 넘어 세계의 모든 곳에서 추구된다. 이런 생각의 구현은 그의 반동 세력으로 참혹한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값을 지불하기도 한다. 그리고 전쟁 이후의 세대는 번영의 시대를 반세기 이상 즐겨온 것이다. 계층 간의 차이는 자유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상의 문제가 되지 않아지고 개인의 권리는 더 신장되어 왔다. 인종간의 벽을 없애려는 노력은 지속되었고 국가간의 빈곤의 격차도 꾸준히 좁혀져 왔다.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던 부와 권력이 분산되고 개인화 되는 과정이 일반적인 역사의 진행과정이라면 현대에 사는 우리들은 그 변화를 가장 실감나게 경험한 사람들이다. 산업화는 이 세계화된 풍요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수공업을 떠나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공산품은 우리들 생활을 더 편하고 풍요롭게 하여준다. 생활용품이나 교통과 통신수단의 기술도 많은 발전을 하면서 우리는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의복을 입고 편하게 살면서 새로운 교통통신수단으로 세계가 하나가 된 생활을 한다. 일정한 일을 하고 있는 많은 개인들은 사실 예전에 왕이 누리던 식생활보다 나쁘지 않은 음식들을 즐긴다. 사회의 축적된 부는 교통, 통신, 에너지, 유틸리티 등의 기간 시설을 건설하고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고 여가에 문화를 즐기고 의료와 교육이 공급되는 도시들은 세계화와 함께 엄청난 성장을 하면서 도시의 승리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 평화와 번영의 기간 우리들은 또 다른 미래가 오고 있는 것을 보아온다. IT 기술의 발전과 정보통신 기술의 변혁이 빠르게 우리들의 모든 생활을 바꾸고 있다. 연산기술, 정보통신기술, 그리고 이제 인공지능까지의 기술들은 우리 생활의 변화가 어디까지가 될지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게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 이 기술들은 우리를 지금까지 잘 살게 하여준 산업사회의 모든 것을 구조적인 것부터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산업사회가 기여하고 있던 많은 것과 함께 그것이 넘으려고 하던 한계와 또 그것이 갖고 온 문제들을 다 뛰어넘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이 풍요와 편리는 새로운 문제를 키워 오기도 했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풍요로운 생활환경이 사람들의 수명을 계속 연장 시키면서 세대 간 인구 분포를 급격히 바꾸어 놓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세대 간 갈등을 빚기도 한다. 풍요로움도 모두가 같은 풍요가 아니다 보니 빈부의 차이는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갈등도 사회문제로 대두 된다. 기술의 발전에 의한 직업형태의 변화는 안정된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게 만들고 젊은이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출처가 다른 정보의 홍수는 그 정보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고 정보를 소유할 권리를 갖게 된 개인들은 상반된 정보들로 혼돈되어 가기도 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은 건축에서 극단적으로 두드러진다.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문명의 혜택이나 또는 그것들의 병폐는 건축에서 그 현상이 극명하게 들어난다. 건축은 점점 가진 자들의 몫이 되고, 건축가들의 서비스는 부와 권력이 있는 곳으로 집중되어 왔다. 기술의 발달과 산업화 된 의식주를 위한 수단 중 유독 건축은 이 기술과 유리된 체 변화하는 세상과 무관하게 옛 것에 머무르고 있다. 건축의 문제는 건축이 문제를 갖고 있다는 자각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사람들은 변화에 늘 수동적이다. 관습에 의해서 사는 것을 편하게 생각해서 사람들의 대부분은 관습이 바뀌는 것을 선호하지 않지만 그런 중에도 한국 사람들은 특히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불변을 미화하기도 한다. 변절을 죄악시 하면서 절개를 귀히 여기고 변하는 것은 그 자체로 결함이 있는 증거로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늘 푸른 소나무나 곳곳한 대나무를 사랑하는 것도 변화를 기피하는 한국 문화의 성향을 들어낸다. 그래서 건축의 지속성을 천년건축으로 변질시켜 찬양하기도 한다. 과거에서 삶이나 가치의 전형을 찾으려는 것도 변화를 원하지 않는 성향과 연계되어 있는 현상이다. 과거에서 전형을 찾는다거나 과거에 생각의 초점을 맞추려 하는 성향은 동양의 삼국 한중일이 닮은 점이 있어서 이들 삼국의 관계는 항상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과거로 늘 회귀하려는 성향은 한국이 가장 심하다. 현실이 제기하는 문제들의 해법이 잘 안보이면 우리는 곳 과거로 돌아가려고 한다. 과거에서 답을 찾아보려는 것은 한국인 모두에게 너무 익숙한 일이다. 과거 또는 이미 있는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역사의 선례에서 전형을 찾으려는 노력은 논리적이고 참된 명제를 얻기 위함이기보다는 나를 정당화 할 수 있는 논리를 구축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현실을 왜곡시키기도 하는데 소위 지식인들이나 철학자 행세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더욱 부추긴다. 그리고 많은 난해한 어휘들을 제조한다.
사람들이나 사회가 다 변화에 부정적이고 수동적이라서 한국은 늘 외부의 여건에 의해서 변화가 강제 되어 왔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바뀌어진 우리의 역사를 찾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외부의 영향으로 엄청난 변화를 맞는다. 일본의 통치와 한국동란이 오래된 사회구조와 사회 환경을 극심하게 파괴하고 변화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 되는 때를 맞는다. 더 나빠 질래야 나빠질 수 없는 여건에서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세상이 된다. 한국이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풍요와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은 사회구조와 도시건축 환경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게 된 상황 때문에 만들어진 기적인 듯하다.
한국은 대전이후의 세계화, 민주화의 실질적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사회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제는 온전히 세계의 경제에 속했을 때 성장했고 한국의 사회문화적 변화와 발전은 온전히 바깥세상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폐허에서 이뤄낸 성장이 이제 그 끝에 이른 것 같고 세상이 안과 밖에서 다 바뀌려 하고 있다. 그동안 바뀌어야겠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면서도 바꾸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온 것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바뀌지 않는 것의 으뜸은 건축이다. 세계의 건축이 다 과거에 발을 담고 있지만 한국의 건축은 전형을 이미 있는 것에서 그리고 과거에서 찾으려는 것에서 벗어날 징조를 보이지를 않는다.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느라 왜곡된 논리는 건축을 이해하고 즐기고 사용하는데 많은 혼돈을 주고 있다. 왜곡된 사실을 논리화 하다보면 그 언어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 그것이 설명하려는 내용이 심오해서 난해해지기도 하는데 그 내용이 왜곡돼있어서 난해해 지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건축의 논리는 왜곡된 사실을 합리적인 듯 하려니 난해해진다. 삶과 죽음이라던가 어둠의 빛이라는 이상한 명제가 붙은 대학생들의 졸업 작품을 흔히 본다. 이것은 학생뿐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들에게서도 자주 보이는 일이다. 자연은 불변의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확신해서 땅을 신성시 하다 보니 풍수지리를 공부하고 그것을 내세우는 건축가는 없지만 건축가들은 으레 땅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설계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에서 많은 계획의 정당성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땅에 큰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땅만큼이나 기억이라는 단어는 한국 건축가들에게 인기있는 단어이다. 이제 전통이라 직설적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으면서 그것을 좀 친숙한 언어로 바꾸어 부른다.
한국 건축가들은 건축이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산물이고 그래서 자연과 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여전히 기계가 만들어내는 정교함이나 성능보다는 사람의 손이 만들어 내는 것을 손맛이 있다고 선호한다. 옛날 선비가 누리던 귀족취향이다.
나는 한때 건축의 정성성을 정량화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가치나 그것을 하고 있는 나의 존재가치가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그 가치를 들어내보이려는 치기이기도 했었다. 합리주의적인 현대사회에서 살다보니 모든 것이 논리적 타당성을 가져야만 그것이 옳고 그래서 모두에게 설득되어 진다는 진솔한 생각이기도 했다. 결국 나는 정성적 가치를 정량화 하지를 못했고 지금 나는 정성적 가치는 정량화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갖고 있다. 나도 그랬었지만 이 두 성격이 다른 가치를 한 가지로 생각하면서 우리는 엄청나게 부조리한 건축의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난해한 명제를 붙인 학교 프로젝트부터 그 결과가 늘 석연치 않은 현상설계까지 건축가들은 혼돈된 열정의 시간을 보낸다. 두 가지 가치의 혼재는 우리의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끝없는 논쟁을 만들고 있지만 건축에서 그것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로 매일의 건축가들의 생활을 지배한다. 건축의 정성적 가치의 본질은 그 건축을 계획하는 건축가에게서 비롯된다. 건축가의 지식뿐만이 아니라 그의 기호, 버릇, 능력, 그리고 그의 주위 환경 모든 것의 주체인 그를 통해서 건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사람들이 없듯이 같은 건축이 만들어지기가 힘든 것이다. 건축은 그것이 놓이는 땅이나 프로그램이 특정시기의 특정용도에 맞추기 때문에 특정하다기 보다는 그것을 보는 건축가들의 보는 눈이 다르고 그것에 대한 건축가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이 다름을 우리는 정량화해서 채점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이 건축가 개개인이 갖고 있는 차별성과 개별성에서 비롯된 만큼 그것을 평가하는 것도 보는 사람들에 따른 주관적인 개별성에 따르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건축이 다행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때 어떤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교적 좋아하는 것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한정된 몇몇이지만 아주 사랑하는 건축이 될 수도 있다. 단지 여기서 우리들은 좋아하던 아니면 별로 좋아하지 않던 그것을 만든 건축가의 의도와 선택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건축에서 공론화 되어야 하는 부분은 건축의 정량적 부분이다. 그런데 정량적으로 평가될 수 있고 객관화 시키어 일반적 해법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 되는 부분은 건축의 관심에서 소외 되어왔다.
건축을 부동산이라고 하면 모욕을 느끼는 건축가들이 많다. 그러면서도 부동산으로 불리는 건축은 건축의 99%이상이다. 기술이 건축에 기여하는 것이 보이면 형이하학적 산물로 보고 평가절하 하려는 건축가도 있다. 하지만 건축은 항상 기술에 의존해왔고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이 되어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축이 부의 근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건축이 자본의 문제를 해결하려하기 보다는 이를 부정해 버림으로 건축가들은 스스로 현실에서 소외된다. 그리고 이 문제와 연관되어 가장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기술을 폄하함으로 건축은 현실에서 동떨어져 왔다. 기계가 동력을 얻어 동물의 힘을 빌리던 일의 양이 무한히 확대되고 시설이 동력을 얻어 생산이 무한히 늘고 이제 무한히 늘은 생산의 양 뿐만 아니라 그 종류를 다양하게 하기도 하고 그 생산을 각 개인의 필요에 따라 자동으로 맞춤 생산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데 건축은 아직도 사람들이 필요한 것 하나하나를 손으로 만들고 있다.
헌데 이제 새로운 기술로 모든 기존의 사회 구조와 산업구조가 그 실효성을 잃어가면서 변혁을 필요로 하는 변혁의 시기가 되었다. 건축도 물론 변화를 강하게 요구 받고 있다.
건축은 그것이 들어설 토지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과정이 너무나 비싸졌다. 건축가는 건축이 비싸다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단지 건축가는 정상적인 작업을 하기에는 너무 적은 비용을 받는 다는 것으로 이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작업하기에 필요한 비용은 사용자가 지불하기에는 지나치게 과대하다. 현장 중심의 맞춤 건설은 산업사회가 누리는 제조기술의 혜택을 멀리한 체 과대한 비용을 더 절감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건축의 소비자는 주거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생활의 많은 부분을 희생하지만서도 주거비로 인한 부채부담으로 생활의 위협을 받을 사정이다. 고비용건축의 모든 것을 지불하고 그 산물을 소유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건축의 비용을 알고 있다고 일반사람들에게 알려진 인력은 현장에서 집을 짓는 시공사 또는 개발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인데 건축가들은 이들을 업자라고 부른다. 사실 시공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건축의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 건설의 효율을 올리는 정도인데 그나마도 별로 개선은 보이지가 않는다. 그리고 개선을 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설계는 건축의 형태에서부터 그 형태의 건축방법까지를 제한한다. 건축을 하는 방법은 그것의 형태와 그것을 건축하는 기술 두 가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건축의 형태와 기술은 건축의 비용과 밀접하다. 산업사회가 발전시켜온 생산기술, 기계에 의한 작업이 만들어내는 고효율 그리고 자동제어기술 이 모든 것은 건축의 비용을 현저하게 절약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설계에 의해서 계획되는 것이고 그래서 건축가가 주관해야 될 일 들이다. 건축을 정량적으로 분석 판단을 할 수 있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은 비용이다. 그리고 99%가 일상적인 생활비속에서 구매할 수 있는 비용까지 만드는 것이 그 목표가 될 수 있겠다. 건축의 미래는 누구나 구매가능한 건축이 있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기계제품이 갖고 있는 성능을 갖는 것이고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고 즐거울 수 있는 그런 제품이 되겠다. 에너지, 통신, 설비 등을 자족할 수 있고 그래서 독립적일 수 있는 것이다. 자족하는 건축들이 만드는 마을은 경제, 교육, 문화 등이 차별화 되고 개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건축은 민주주의 구현에 능동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두렵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많은 것을 갖고 있다. 이제까지는 인류가 상상하지도 못하던 새로운 기술과 축척된 자본 및 문화를 갖고 있다. 누구나가 사용할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는 미래가 가능하게 하는 생활 프로그램이 있고 현재가 제공하는 가장 우수한 기술이 만들어낸 건축가의 개별성이 보이는 그런 건축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이런 건축은 한국인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한 게 될 것이다.
지금 변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위험한 미래를 상상하게도 만든다. 하지만 지금은 미래를 기다리지 않고 미래를 만들 수 있는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