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 이름 빼라 할 참이었다, 늦게나마 디자인 감리 맡아 다행
[중앙일보] 입력 2011.07.12
서울시 새 청사 ‘마스터 플래너’로 긴급 투입된 건축가 유걸
서울시 신청사 공사가 한창이다. 전체 공정의 절반 정도 완료됐다. 내년 5월 완공이 목표다. 최근 신청사 공사과정에 청사 기본설계를 맡았던 건축가 유걸(71·건축설계사무소 아이아크 공동대표·경일대 석좌교수)씨가 디자인 총괄 책임자로 투입됐다. 이른바 ‘토털 디자인 마스터 플래너(MP)’ 다. 유씨는 새 청사의 기본설계를 한 이후 나머지 진행과정에서 배제됐었다. ‘턴키’(시공사가 설계와 시공을 한 번에 수주하는 방식) 계약방식에 따르면, 설계자가 감리를 할 수 없게 돼 있기 때문이다.
본지는 ‘건축을 건설로 보는 한 프리츠커 상은 어림도 없다’라는 기사(4월 18일자 26면)에서 설계자가 소외되는 한국 건축의 구조적 문제점을 보도했었다. 당시 유씨는 “디자인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서울시가 전격적으로 방침을 바꾼 것이다. 서울시는 최근 건축주(시청)·설계자·시공사(삼성건설)의 책임자를 주축으로 시공 완성도를 위한 TF팀을 만들고, 유씨를 마스터 플래너로 위임했다. 실질적으로 감리를 맡은 것이다.
유씨는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참여하게 돼 다행이다. 설계자가 시공 과정에서 배제되는 일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양재동 아이아크 사무실에서 유씨를 만났다.
-마스터 플래너를 맡게 됐다.
“시청 측에서 요청해왔다. 1년 전쯤 결정됐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다행이다. 현재 공사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다. 살펴보니 내가 참여했으면 절대 안 했을 것이 있더라. 지나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완공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정유승 서울시 문화시설관리단장은 “골조공사는 거의 마쳤고, 내·외부 마감을 하는 중요한 과정이 남았다. 디자인이 시공에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 살펴봐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예전 인터뷰에서 서울시와 시공사를 상대로 디자인을 책임지게 해달라고 편지를 썼다고 했다.
“아이를 낳아놓고 자식을 돌보지 못하는 부모 심정이었다. 설계자 이름에서 내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하려 했다. 시기 문제였을 뿐,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공사가 반쯤 진행됐는데.
“굉장히 어려운 단계에 투입됐다. 늦게나마 참여하게 됐으니 이름을 빼달라고 할 명분도 없어지게 됐다.”
-설계자가 시공 에 참여하는 게 어떤 의미인가.
“디자인의 컨셉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건축가다. 디자인은 시공 과정에서 개발돼야 할 것도 있다. 건물은 실제 크기(풀 스케일)로 미리 지어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600분의 1 규모로 생각한 것의 크기를 키우면 다시 판단하고, 해결해야 할 디테일 요소가 나온다. 현장에서 디자이너가 참여하는 것은 이런 풀 스케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설계자는 집이 완성될 때까지 끝까지 붙어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디자이너는 ‘하청업자’라고 말했다.
“건물을 지으며 시공자, 즉 건설사만 주축이 되도록 왜곡된 제도(턴키)를 만들어놓았다. 내 것, 네 것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방식으로 좋은 건축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좋은 건축을 만들려면 건축주, 건축가, 시공사간 역할 균형이 중요하다.”
유씨는 디자이너의 역할이 추락한 데에는 “과정보다 결과만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도 한몫 했다”고 말했다.
-한국 건축을 어떻게 보는가.
“‘흠 없는 나쁜 건축’이 너무 많다. 예컨대 대부분의 현상설계에서 강점과 장점을 찾기보다 가이드라인을 기준으로 틀린 것을 찾아내는 데 집중하고, 결국 가장 적게 틀린 작품을 당선시키곤 한다. 이렇게 뽑힌 1등이 흠 없는 나쁜 건축이 된다. 차라리 흠이 좀 있어도 특장점이 있는 건축이 더 낫다.”
-결국 돈이 낭비된다.
“그렇다. 나쁜 건축의 대부분은 국민의 세금으로 짓는 공공 건축물이다.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공공건축이 나오려면.
“프랑스 퐁피두센터처럼 프로젝트 책임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익명에, 장점도 없는 나쁜 건축은 그만 만들어야 한다. 리더들이 확실하게 자기 철학과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글=이은주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감리=감리에는 시공 감독과 디자인 관리 기능이 있다. 국내에서 공사비가 100억 원 이상인 공공 건축물의 경우, 건축가에게 설계 만 맡기고 시공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왔다. 감리를 감독의 의미로만 해석하고 설계자의 디자인 관리 역할을 경시한 것이다.
◆유걸=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미국건축사(AIA). 무애·김수근 건축연구소·미국 RNL 아키텍츠 앤 엔지니어 근무. 40여 년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일했다. 아이아크 공동대표(95년~). 96년부터 ‘밀알학교’ ‘전주대 교회’ 등으로 3년 연속 미국건축사협회상 수상. 김수근 건축상(96년). 이건창호 사옥(2000), 배재대 국제교류관·기숙사 등 설계(2005~06) www.iarc.net
본지는 ‘건축을 건설로 보는 한 프리츠커 상은 어림도 없다’라는 기사(4월 18일자 26면)에서 설계자가 소외되는 한국 건축의 구조적 문제점을 보도했었다. 당시 유씨는 “디자인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서울시가 전격적으로 방침을 바꾼 것이다. 서울시는 최근 건축주(시청)·설계자·시공사(삼성건설)의 책임자를 주축으로 시공 완성도를 위한 TF팀을 만들고, 유씨를 마스터 플래너로 위임했다. 실질적으로 감리를 맡은 것이다.
유씨는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참여하게 돼 다행이다. 설계자가 시공 과정에서 배제되는 일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양재동 아이아크 사무실에서 유씨를 만났다.
-마스터 플래너를 맡게 됐다.
“시청 측에서 요청해왔다. 1년 전쯤 결정됐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다행이다. 현재 공사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다. 살펴보니 내가 참여했으면 절대 안 했을 것이 있더라. 지나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완공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정유승 서울시 문화시설관리단장은 “골조공사는 거의 마쳤고, 내·외부 마감을 하는 중요한 과정이 남았다. 디자인이 시공에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 살펴봐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예전 인터뷰에서 서울시와 시공사를 상대로 디자인을 책임지게 해달라고 편지를 썼다고 했다.
“아이를 낳아놓고 자식을 돌보지 못하는 부모 심정이었다. 설계자 이름에서 내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하려 했다. 시기 문제였을 뿐,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공사가 반쯤 진행됐는데.
“굉장히 어려운 단계에 투입됐다. 늦게나마 참여하게 됐으니 이름을 빼달라고 할 명분도 없어지게 됐다.”
-설계자가 시공 에 참여하는 게 어떤 의미인가.
“디자인의 컨셉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건축가다. 디자인은 시공 과정에서 개발돼야 할 것도 있다. 건물은 실제 크기(풀 스케일)로 미리 지어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600분의 1 규모로 생각한 것의 크기를 키우면 다시 판단하고, 해결해야 할 디테일 요소가 나온다. 현장에서 디자이너가 참여하는 것은 이런 풀 스케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설계자는 집이 완성될 때까지 끝까지 붙어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디자이너는 ‘하청업자’라고 말했다.
“건물을 지으며 시공자, 즉 건설사만 주축이 되도록 왜곡된 제도(턴키)를 만들어놓았다. 내 것, 네 것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방식으로 좋은 건축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좋은 건축을 만들려면 건축주, 건축가, 시공사간 역할 균형이 중요하다.”
유씨는 디자이너의 역할이 추락한 데에는 “과정보다 결과만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도 한몫 했다”고 말했다.
-한국 건축을 어떻게 보는가.
“‘흠 없는 나쁜 건축’이 너무 많다. 예컨대 대부분의 현상설계에서 강점과 장점을 찾기보다 가이드라인을 기준으로 틀린 것을 찾아내는 데 집중하고, 결국 가장 적게 틀린 작품을 당선시키곤 한다. 이렇게 뽑힌 1등이 흠 없는 나쁜 건축이 된다. 차라리 흠이 좀 있어도 특장점이 있는 건축이 더 낫다.”
-결국 돈이 낭비된다.
“그렇다. 나쁜 건축의 대부분은 국민의 세금으로 짓는 공공 건축물이다.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공공건축이 나오려면.
“프랑스 퐁피두센터처럼 프로젝트 책임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익명에, 장점도 없는 나쁜 건축은 그만 만들어야 한다. 리더들이 확실하게 자기 철학과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글=이은주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감리=감리에는 시공 감독과 디자인 관리 기능이 있다. 국내에서 공사비가 100억 원 이상인 공공 건축물의 경우, 건축가에게 설계 만 맡기고 시공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왔다. 감리를 감독의 의미로만 해석하고 설계자의 디자인 관리 역할을 경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