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06. 18 [한겨레] 서울 신청사 관련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오는 9월에 새 서울시청 건물이 문을 연다. 새 서울시청 건물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건물의 모양이 옛 서울시청 건물을 덮치는 ‘쓰나미’를 닮았다는 의견이 가장 많은 것 같다. 6월16일 토요일치 <한겨레>를 보니 김한민 작가가 새 시청이 에스프레소 기계와 닮았다고 하는데, 그걸 읽고 보니 우리 집에서 쓰던 토스터와도 닮았다. 새 시청의 태평로 쪽은 메뚜기나 외계인 눈을 닮은 부분도 있다.
_김현민의 감수성 전쟁, 랜드마크 혹은 흉물 편의 삽화. 김한민, 한겨레
서울시청 건축과 관련해 나도 얼마간 인연이 있다. 2008년 지역부에서 지역팀장으로 일할 때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적이 있다. 서울시가 새 서울시청을 짓겠다고 등록문화재(근대문화재)였던 옛 서울시청 건물의 회의실과 날개 부분을 제멋대로 부순 사건 때문이었다. 이 파괴에 대해 처음에 강력히 반발하며 원상 복구를 요구하던 문화재위원회는 결국 나중에 서울시의 ‘반달리즘’을 모두 추인해주고 말았다.
당시 오세훈 시장이나 이명박 전 시장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지만, 문화재위원들은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가 하며 화가 났던 기억이 떠오른다. 개인적으로도 서울시의 대표적 풍경 가운데 하나이며 랜드마크 건물이라고 할 서울시청 건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내 블로그에도 ‘새 서울시청 어떻게 지을까’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의 내용의 핵심은 역사와의 조화, 주변 공간과의 조화였다.
_2008년 서울시가 새 시청을 짓기 위해 부순 옛 시청의 회의실 모습. 김규원
그러나 이번에 공개되는 새 시청 건물은 설계가 확정됐을 때부터 실망스러웠고, 그 설계에 따라 지어진 건물이 나타난 것을 봐도 역시 실망스럽다. 이미 다 지어진 건물이어서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건물을 설계한 유걸 건축가가 몇몇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내용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게 됐다.
그는 5월31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두 건물의 조화를 우선적으로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건물이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게 좋다고 봤다. 다양성에 의한 조화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질적인 두 건물이 서로를 돋보이게 하면서 공존하자는 의도였다. 처음엔 어색해 보이겠지만, 두 건물의 차이를 경험하면 똑같은 건물 두 개보다 더 즐기게 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_옛 시청 건물을 덮치는 듯한 새 시청 건물 '쓰나미'. 서울시
많은 시민들이 이 건물에 대해 눈에 거슬린다거나 생뚱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유 건축가는 옛 시청 건물이 앞에 떡하니 서있는데도 새 건물을 설계하면서 처음부터 그 건물과의 ‘조화’를 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건물은 ‘결과적으로’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도록 설계된 것이다. 애초부터 건축가에게 조화에 대한 생각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서울시청의 두 건물은 ‘너는 너, 나는 나’식의 생뚱맞은 풍경을 연출하게 됐다.
나는 이 건물의 가장 큰 문제가 ‘역사’와 ‘이웃’에 대한 무례함, 또는 배려 없음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 건물을 설계한 유걸 건축가는 자신이 설계하는 새 서울시청 하나만 생각했지 바로 앞에 서 있는 옛 시청이나 주변의 도시 풍경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민들은 이 건물을 보면서 불편을 느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누가 뭐래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고, 주변이야 무슨 상관이 있냐’는 유아독존의 태도다.
_옛 시청을 덮치는 쓰나미 또는 먹구름 같은 새 시청 건물. 한겨레
옛 서울시청 건물은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일제 때 근대 건축물 가운데 대표적인 세 공공 건물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두 건물은 서울역과 한국은행이다. 서울시청이 본래 기능을 잃으면서 세 공공 건물이 모두 본래의 쓰임새를 잃었다. 서울역은 전시공간이 됐고, 한국은행은 화폐박물관이 됐으며, 서울시청은 서울시 자료관이 됐다.
세 건물 가운데서도 서울시청이 가장 처량하게 됐다. 나머지 두 건물과 달리 서울시청은 핵심 공간 가운데 하나인 회의실이 헐렸고 내부도 대부분 헐렸기 때문이다. 회의실이 아예 헐린 이유는 오직 오세훈 전 시장과 유걸 건축가가 합작한 이 ‘쓰나미’를 짓기 위해서였다.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처럼 새 건물에 부지를 내주기 위해 옛 건물의 핵심 공간이 헐렸다. 당시 서울시는 그 공간을 지하에 ‘이전 복원’하겠다고 했는데, 이번에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_메뚜기 또는 외계인 눈을 닮은 새 시청 옆 모습. 한겨레
당시 과연 누가 이런 의견을 내고 결정했을까 궁금했는데, 이번에 확인한 것은 유걸 건축가는 처음부터 옛 시청 건물을 헐자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지난 2월18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구청사는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대건축의 가치나 아름다움이 거의 없는 건물이다. 보전해야 한다니 전면은 그대로 두고 내부를 변형했다”고 말했다. 옛 건물을 깨끗이 헐고 자신의 새 건물을 짓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옛 건물은 내부를 ‘변형’했다고 당당히 말했다.
나는 유걸 건축가와 같은 이런 시각 때문에 600년 역사의 서울과 2000년 역사의 한국에서 정작 100년의 역사를 담은 건물이나 공간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도시와 건축에서는 2000년 역사는 고사하고 50년, 100년 역사도 찾아보기가 극히 힘들다. 건물이고, 길이고, 자연이고 모두 마찬가지다. 옛 것이라면 기를 쓰고 부수고 없애버린다. 그래서 걸핏하면 5000년 역사를 들먹이는 한국에서 풍경은 50년도 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_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철거되는 조선총독부 건물. 한겨레
그의 이런 '오직 예술가적' 역사의식은 <조선> 인터뷰의 다른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김영삼 정부 때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조선총독부 건물을 허무는 것은 반대했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총독부는 극악한 위치가 문제였지, 건물 자체는 건축적으로 아름답고 가치가 있었다”고. 결국 유 건축가의 궁긍적 관심사는 건물의 단독적인 아름다움일뿐 역사나 주변 도시 공간과의 조화는 아닌 것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논란을 빚을 때 철거에 찬성하는 시민들은 “총독부 건물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경복궁 한가운데라는 극악한 위치 때문에 허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 건축가는 그런 생각의 정반대에 서있다. 그러고 보니 옛 시청 뒤의 ‘쓰나미’와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 앞 ‘총독부’ 건물이 비슷한 역사적, 공간적 부조화를 보여준다. 경복궁의 한복판을 헐어서 총독부를 지은 건축가나 옛 시청을 허물어서 새 시청을 지은 건축가나 역사와 주변 맥락을 무시하는 의식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_새 시청의 쓰나미 부분 확대. 한겨레
인터뷰 가운데 쓰나미 모양의 처마를 설계하게 이유를 설명한 대목도 역시 이해하기 힘들었다. “가운데 서서 가로막고 있는 구청사 너머로 서울광장과 대화하려다 보니 신관 건물이 안간힘을 써서 고개를 내밀게 됐다. 결과적으로 재미있는 설계 아닌가. 신관이 구청사를 극복하려 애쓰는 모양새인데, 이는 일본과의 과거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일본과 관련된 이슈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듯하다.”
여기서도 나타나는 문제는 유 건축가는 옛 시청을 장애물 정도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옛 시청 앞에 시청 광장이 있고, 새 시청이 옛 시청 뒤에 있다면,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당연히 새 시청을 옛 시청과 대화하도록 설계하고, 시청 광장과의 대화는 옛 시청을 통해서 하도록 설계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 건축가는 새 시청이 ‘장애물’인 옛 시청을 건너뛰어서 시청 광장과 직접 대화하기 위해 건물 고층부를 앞으로 빼서 옛 시청을 덮치는 쓰나미 같은 설계를 했던 것이다. 이것은 나만 한강을 즐기겠다고 한강 가에 고층 건물을 짓는 정신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
_새 서울시청의 뒷모습. 차라리 이런 단순한 디자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한겨레
또 자신의 건물이 “일본과 관련된 이슈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듯하다”고 말하는 대목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과도하게 반응하는’ 그런 의식이 우리 사회에 있다면 건축가는 당연히 그것을 순화하고 치료하는 건물을 설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국 사회에 그런 과도한 의식이 있어서 자신도 건물을 '과도하게' 지었다는 것이 말이 되나. 상식적인 판단력을 가진 건축가라면 과거 일본인들의 잘못을 극복하고 동시에 현재의 일본인들과 대화하려는 노력을 새 건물에 담아야 할 것인데, 그의 설계에서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과도한 모습만 눈에 띈다.
결론적으로 유걸 건축가에게는 옛 서울시청 건물의 역사와 존재에 대한 존중감이 전혀 없었다. 그는 설계 과정에서 옛 시청을 완전히 제거하고 싶어했고, 그렇게 되지 않자 옛 시청을 완전히 무시하는 설계를 했다. 예를 들어 회의실 공간을 없애버린 것이나 옛 건물의 스케일이나 디자인, 소재와 전혀 관계없는 건물을 설계한 것, 옛 건물을 위압하는 듯한 ‘쓰나미’ 디자인을 한 것, 새 건물의 입지를 옛 건물과 대칭을 이루도록 하지 않고 비껴서 짓도록 한 점 등이 그 근거들이다.
_새 서울시청 여러 설계 가운데 나는 이 설계안이 가장 무난했다고 본다. 서울시
거꾸로 유걸 건축가가 옛 건물, 역사에 대한 존중감이 있었다면 아마도 이렇게 짓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첫째 자기 건물을 짓기 위해 옛 시청의 핵심 공간인 회의실을 훼손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옛 시청의 디자인이나 스케일, 소재 등을 고려해서 새 시청을 설계했을 것이다. 셋째 옛 시청의 뒤쪽으로는 되도록 옛 시청과 잘 어울리는 스케일과 디자인의 건물을 (연결해서) 지었을 것이다. 넷째 옛 시청의 동쪽(국가인권위원회 쪽) 빈 공간에는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운 디자인의 새 건물을 지었을 것이다.
유 건축가가 옛 시청과 별로 관계없는 새 시청을 설계했더라도 한 가지만 배려했다면 현재와 같은 지나치게 이질적인 두 시청의 모습은 피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새 시청을 좀더 단순한 디자인으로 설계했더라면 옛 건물과의 부조화나 비대칭을 완화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 건축가는 끝까지 그런 일말의 배려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새 시청이 옛 시청을 뒤에서 밀어붙이고 덮치는 듯한 무례하고 배려없는 디자인으로 건물이 완성됐다.
_수평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은 이 건물의 장점이다. 한겨레
물론, 이 건물에서 높이 평가할 대목도 있다. 건물을 수직형이 아니라, 수평형으로 설계했다는 점이다. 유 건축가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은 평지에 들어선 외국 도시들과 다르다. 산이 랜드마크가 되는 도시이므로 굳이 수직적 랜드마크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국내외에는 옛 건물에 대해 예의와 배려심을 가진 새 건물들도 많다. 서울에서는 신세계 백화점을 첫째로 꼽고 싶다. 또 영국에서는 새 건물을 지을 때 반드시 옛 건물을 배려한다. 사진을 몇 장 소개한다. 언젠가 더 배려심있고 사려깊은 건축가가 옛 건물에 대한 존중감을 보여주면서도 아름다운 새 건물을 설계하는 것을 보고 싶다. 서울시청이 좋은 사례가 될 수도 있었으나, 이젠 흘러간 물이 돼버리고 말았다. 아쉽고 안타깝다.
_서울의 건물 가운데 새 건물(뒤)과 옛 건물(앞)이 잘 어울리는 신세계 백화점. 김규원
_런던 세인트 폴 성당 옆 파터노스터 지구의 새 건물(왼쪽)과 옛 건물. 김규원
_케임브리지 대학 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옛 건물(왼쪽)과 새 건물. 김규원
_영국 버밍엄 도심의 오래된 교회 옆에는 초현대식 백화점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근데 의외로 잘 어울린다. 아마도 단순한 디자인, 비슷한 스케일, 두 건물 사이의 적절한 거리 등에 힘입은 것이 아닌가 한다. 김규원